미국 후딱 한바퀴 (8) 잊지못할 배드랜즈의 하늘
사우스 다코타주는 프레리 대평원이 끝나고 산악지대가 시작되는 접경지역이었다.
지형과 기후의 변화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광활한 해바라기 밭을 지나니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누른 풀들만 메마른 대지를
지키고 있었다. 허허벌판 길을 계속 달리다 배드랜즈국립공원을 한 시간 남짓 앞둔
지점에서 예상치 않은 표시판을 지나쳤다. "Entering
Mountain Time Zone"
그게 뭔가 했더니 시간변경선이었다.
중부표준시(Central Time Zone)에서 산악표준시로 바뀌었다.
주 경계선도 아닌데? 사우스 다코타주 내에서 시간대가 바뀌니 어리둥절했다.
같은 주 내에서도 시간이 서로 다를 수 있다니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중국은 미국 만큼 땅이 넓은데도 나라 전체가 단일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데...
같은 주에서 조차 시간 차가 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사우스 다코타 처럼 시차가 있는 주가 12개 주나 더 있었다.
1883년까지는 시와 군(카운티)까지도 마음대로 표준 시간을 정했다니
이 정도로 표준화된 것만도 다행이라 해야 할 것 같았다.
미국 본토 내에서 3시간 시차가 있고 하와이와 괌을 포함하면 5~14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실수하지 않게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또 한 시간을 벌었다.
시간대가 바뀌었으니 여기부터는 로키산맥의 영역이었다.
90번 하이웨이에 다시 올라 몇 분을 더 달리니 저 멀리서 풀 한 포기 없는
황토빛 흙더미가 끝없이 이어져 있는 광경이 보였다.
3억평(982.40km2)이나 되는 배드랜즈국립공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땅은 원래 주인인 인디언 수족이 '나쁜 땅'이라 불렀고 처음 지나간 프랑스인도
'가로 질러가기 나쁜 땅(Bad Lands to Travel Across)'이라 부르면서
'가로 질러가기 나쁜 땅(Bad Lands to Travel Across)'이라 부르면서
배드랜즈가 되어버렸다. 공원 북동입구(Northeast Entrance)로 들어섰다.
넓은 들판을 아스라이 가로 막고 있던 황토빛 흙더미가 점차 제 모습을 드러냈다.
좀 더 다가가 '빅 배드랜즈 전망대(Big Badlands Outlook)'에서 내려다 보니
대지진으로 딱 갈라진 것 같은 가파른 계곡이 큰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백미터는 족히 될 듯한 절벽이었다.
깎이고 패인 봉우리와 계곡은 오만가지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줄 무늬 유니폼을 맞춰 입은 듯 일체감을 주었다. 원래 이곳은 큰 호수였다.
짙고 옅은 황토빛 줄 무늬 지층은 인근 블랙힐스(Black Hills)에서 흘러내린 퇴적물이
수천년간 켜켜이 쌓여 형성된 것이었다. 400~500m나 되는 퇴적층은 지각변동으로
솟아오른 뒤 수백만년 동안 온갖 풍상과 눈비를 이겨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었다.
인고의 세월을 거쳐 형성된 극도의 황량함에서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풍겨나왔다.
이런 풍광을 보면 영화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에서 주연 케빈 코스트너
(Kevin Costner)가 말을 타고 이 곳을 질주하던 호쾌한 장면이 떠오르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 보다는 팥 시루떡과 케익이 먼저 떠올랐다. 시장기 때문이겠지?
배드랜즈의 트레일 코스가 시작되는 도어 트레일헤드(Door Trailhead)를 향해 차를
달리니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구름 사이로 강한 햇살이 서치라이트처럼 비쳤다.
기밀 시설로 들어가기 전, 보안 점검용 엑스레이 투시기를 통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연 투시기를 지나자 하늘이 거짓말처럼 밝아오더니 저 멀리 모래로 쌓아 올린 것 같은
특이한 모양의 첨탑 봉우리들이 나타났다.
그 첨탑 봉우리들 사이에는 저편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게 파 놓은 듯한
나지막한 고갯길이 있었다. 천국으로 넘어가는 관문인가?
서둘러 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주차장에는 트래킹을 마치고 일찌감치 숙소로 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고 있는
여행객들이 눈에 띄었다. 저 만치 보이는 고개를 향해 가파른
황토길을 잰걸음으로 올랐다. 저 너머 풍경이 몹시 궁금했다.
황토빛 봉우리 사이에 올라서니 갖가지 모양의 사구와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마른풀이 보이는 곳이 배드랜즈의 시작점이겠지? 사구과 계곡은 세월이 갈수록
더 깎이고 패이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주름살이 늘어나는 것처럼.
바로 이 곳이 짧지만 배드랜즈를 대표하는 도어(Door) 트레일 코스였다.
마추픽추, 트랜스 캐나다, 호주 비불문(Bibbulmun), 히말라야 등 세계 유명
트래킹 코스를 다녀본 사람들이 이 코스를 손가락으로 꼽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했다.
이 트래킹 코스는 거리가 1.6km에 불과하지만 화성을 탐사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주위의 바위와 벽을 만져보니 어떤 부분은 단단했지만 푸석푸석
부서지는 부분도 많았다. 지금도 매년 2.5~15cm씩 깎이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고개를 돌려 주차장 방향을 바라보니 구름 위로 햇살이 비치면서 인상파 그림 같은
하늘과 황량한 대지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천상의 기운이
나쁜 땅을 선한 대지로 감화시키고 있는 듯했다.
서쪽 하늘을 연보라빛으로 물들인 태양은 메마른 벌판을 홍조 띤 대지로 되살렸고
푸석푸석한 모래산마저도 후광을 내뿜는 큰 바위의 얼굴처럼 환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상서러운 하늘과 나쁜 땅이 어우러져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절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상서러운 하늘과 나쁜 땅이 어우러져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절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흙비탈을 내려와 만리장성처럼 보이는 캐슬 트레일헤드(Castle Trailhead)를
향해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끝이 뾰족뾰족한 성곽이 앞을 가로막더니 몽환적인 자태로
눈앞에 다가왔다. 성 안으로 들어가니 통로 위의 하늘은 신비로운 빛으로 가득했다.
하늘이 이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시선이 온통 하늘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캐슬 트레일헤드에 들어서자 하늘은 핑크빛으로 바뀌었다.
천국의 성으로 들어가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 황량한 대지, 배드랜즈가 천국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니 아이러니였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캐슬 트레일헤드에는 화석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16km나 되는 긴 하이킹 코스가 있었다.
1800년대 서부 개척시대의 미국인들처럼 그늘 하나 없는 땡볕 길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해가 지기 전에 대통령 얼굴이 조각된 러시모어산에 가야 한다는 핑계로
캐슬 코스 트래킹을 포기하기로 했다.
시원하게 에이컨이 나오는 차 안에서 절묘한 풍광을 감상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기를 잘못 부렸다가는 배드랜즈의 진맛을 보기 십상이었다. 윈도우(Window) 트레일헤드와
노치(Notch)
트레일헤드를 지나니 머리를 높게 치켜세운 봉우리가 길을 가로 막았다.
수많은 봉우리들도 이에 뒤질세라 자태를 뽐내며 앞으로 다가왔다.
촘촘한 봉우리 숲을 빠져 나오니 오른쪽이 탁 트이면서 황량한 벌판과
크지 않는 향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더 패스(Cedar Pass)길이었다.
이 길이 끝날 쯤 클리프 셸프 내츄럴 트레일헤드(Cliff Shelf Nature Trailhead) 주차장이
나타났다. 배드랜즈 남단을 가로질러 흐르는 화이트강(White River) 계곡과
이 지역 특유의 자연 생태계를 살펴보려면 이 코스를 트랙킹해야 했다.
생물 화석이 즐비한 회색빛의 화이트강과 바로 이어 나타난 '벤 라이펄 방문객센터
(Ben Reifel Visitor Center)'도 지나쳐야 했다. 벤 라이펄은 인디언 어머니와 독일계 아버지를
둔 정치인으로 인디언 권익신장에 크게 기여해 이 지역에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선택의 기로는 또 있었다. 공룡의 발자국과 파노라마 뷰와 피너클, 헤이 뷰트 등
명소들이 즐비한 240번 도로 대신 1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44번 도로를 택해야 했다.
인테리어(Interior) 입구를 빠져 나올 때는 아쉬움에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국립초지인
'버팔로 갭(Buffalo Gap)'을 가로지르는 44번 도로는 러시모어산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
아니라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관객들을 압도한 버팔로 떼들이 출몰하는 통로였다.
전문가가 아닌 여행자에게는 배드랜즈의 비슷비슷한 봉우리와 계곡과 화석보다는
버팔로 떼가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버팔로 떼를 볼 수 있다면
배드랜즈의 반쪽을 포기해도 억울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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